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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이야기 1부] 지렁이는 왜 비 오는 날 보도블록에 나와 죽어 있을까?

greatclean 2026. 6. 30. 11:20

지렁이는 왜 비 오는 날 보도블록에 나와 죽어 있을까? 우리가 몰랐던 놀라운 진실 (1부)

 

 

 

비가 밤새 내린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나선 나는 늘 보던 풍경과 마주쳤다. 보도블록 여기저기 길게 누워 있는 지렁이들. 몇 마리는 아직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바짝 말라 죽어 있었다.

문득 어릴 적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비가 오면 땅속에 물이 차서 지렁이들이 익사하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오는 거래." 그땐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궁금해졌다. 정말 그게 다일까? 그래서 직접 자료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답은 내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흙 속의 작은 엔지니어

먼저 지렁이가 어떤 존재인지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했다. 우리는 흔히 지렁이를 그냥 흙 속에 사는 벌레 정도로 여기지만, 과학자들은 지렁이를 '토양의 엔지니어(Ecosystem Engineer)'라고 부른다. 지렁이가 흙을 끊임없이 먹고 배설하는 과정에서 토양의 구조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지렁이가 지나간 흙에는 공기가 잘 통하고, 물이 잘 스며들며, 식물이 뿌리내리기도 쉬워진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지렁이가 많은 땅을 최고의 토양으로 여겼고, 옛 농부들은 지렁이가 많으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몸 전체가 허파인 동물

자료를 더 들여다보다가 가장 놀란 사실이 있었다. 지렁이에게는 폐도, 아가미도, 곤충처럼 숨구멍도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지렁이는 몸 전체로 숨을 쉰다. 정확히는 피부를 통해 산소를 흡수하는데, 여기엔 까다로운 조건이 하나 붙는다. 피부가 항상 촉촉해야 한다는 것.

피부가 마르면 산소가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고, 결국 지렁이는 질식한다. 그래서 지렁이는 평생을 촉촉한 흙 속에서만 살아간다. 건조한 여름날 아스팔트 위에서 지렁이를 거의 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익사설은 사실일까

여기까지 알고 나니 그 유명한 가설이 더 궁금해졌다. "땅속이 물에 잠겨 산소가 부족해지면 지렁이가 밖으로 나온다"는 이야기 말이다. 겉보기엔 그럴듯했다. 실제로 흙 속 빈 공간을 물이 채우면 공기가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자료를 더 찾아보니 의외의 사실이 나왔다. 지렁이는 물속에서도 꽤 오래 버틴다는 것이었다. 어떤 종은 물속에서 며칠 이상 생존하기도 한다고 했다. 비가 조금 왔다고 곧장 익사할 만큼 약한 동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지렁이가 한꺼번에 밖으로 나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비 오는 날은 이사하기 가장 좋은 날

최근 생물학자들이 가장 유력하게 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비 오는 날이 지렁이에게 '이사하기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것이다.

평소 지렁이가 흙 속을 이동하려면 흙을 파헤쳐야 하는데, 이 과정에는 생각보다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하지만 비가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표면 전체가 촉촉해지면서 몸이 마를 걱정도 없고, 포식자도 평소보다 적다. 무엇보다 흙을 파지 않고도 멀리 이동할 수 있다. 사람으로 치면 울퉁불퉁한 산길 대신 갑자기 고속도로가 뚫린 셈이다. 그래서 지렁이들은 비 오는 날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기회로 삼는다는 연구 결과가 적지 않았다.

짝을 찾아 나서는 밤

또 하나 흥미로운 이유는 번식과 관련이 있었다. 지렁이는 암수 구분이 없는 자웅동체이지만, 혼자서는 번식할 수 없다. 반드시 다른 지렁이를 만나야 하는데, 땅속에서는 서로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습도가 높은 밤이나 비 오는 날, 지렁이들은 지표면으로 올라와 서로를 찾는다. 비 오는 밤 길을 걷다가 서로 엉켜 있는 지렁이 두 마리를 본 적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교미 중인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렁이에게 비 오는 날은 일종의 만남의 계절이었던 셈이다.

함정이 되어버린 도시

여기까지 알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원래 자연 속이라면 지렁이는 숲이나 흙 위를 옮겨 다니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도시는 다르다. 잔디밭에서 이동을 시작한 지렁이는 어느 순간 보도블록과 아스팔트, 자전거도로, 주차장 같은 인공 구조물과 마주친다.

이 표면들은 지렁이에게 더없이 위험하다. 흙처럼 몸을 숨길 수도, 파고 들어갈 수도 없다. 그저 노출된 채로 머물 수밖에 없다.

밤에는 안전했지만, 아침이 되면

비 오는 밤은 습도가 거의 100%에 달해 지렁이에게는 최고의 환경이다. 하지만 해가 뜨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햇빛이 보도블록을 데우고, 바람이 불고, 습도가 빠르게 떨어진다. 지렁이의 피부도 조금씩 말라간다.

앞서 살펴봤듯 지렁이는 피부가 마르면 숨을 쉴 수 없다. 동시에 몸속 수분도 빠르게 증발한다. 결국 탈수와 호흡 장애가 겹쳐서 찾아온다. 우리가 아침마다 보는, 이미 움직일 힘조차 없는 지렁이들은 바로 이 과정을 거친 결과였다.

햇빛보다 무서운 건조함

많은 사람들이 지렁이가 햇빛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더 큰 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건조함이다. 실제로 흐린 날에도 보도블록 위에 오래 머물면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몸을 덮은 점액이 마르면 피부 호흡이 어려워지고, 결국 생존이 힘들어진다. 특히 여름철 보도블록 표면 온도는 40~50도를 넘기도 하는데, 이 정도면 지렁이에게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환경이다.

그래도 모두가 죽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모든 지렁이가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니었다. 비가 계속 내리거나 주변에 흙이 가까이 있으면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도시에는 흙보다 콘크리트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잔디밭에서 출발한 지렁이가 끝내 흙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탈수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도시가 넓어질수록 이런 모습은 점점 더 자주 눈에 띈다.

이야기를 마치며

비가 온 다음 날, 우리는 흔히 지렁이가 운이 나빠 죽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들여다볼수록 진실은 조금 더 복잡했다. 지렁이는 촉촉해진 비 오는 날을 틈타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떠나고, 짝을 만나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 한다. 다만 그 여정의 끝에 흙이 아니라 보도블록과 아스팔트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도시가 만들어낸 인공 환경은 지렁이에게 예상치 못한 함정이 되고, 그렇게 많은 지렁이가 탈수와 건조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비 때문에 지렁이가 익사하지 않으려고 나온다"는 이야기는 정말 완전히 틀린 걸까. 지렁이는 비 오는 날 어떻게 방향을 찾을까. 새들은 왜 비가 그친 뒤 유독 지렁이를 쉽게 찾아낼까. 그리고 길에서 살아 있는 지렁이를 만났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된다.